寂, 滴, 赤

 

 

 

 

어느 날. 달이 눈부시게 커다랗고 하얗다는 이유로 시작된 술자리에서, 곤도씨는 술취한 목소리로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 내가 거의 억지로 붙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 

 

 

 그 남자에 대한 말이었다. 

 그 남자란 당연히 히지카타다. 마루에 앉아 대작하고 있는 나와 곤도씨와는 달리, 히지카타씨는 왠일로 마당에 자리를 깔고 즐기는 대원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마시고 있었다. 달빛, 온몸 위를 흐르는 것을 내버려두고, 남자의 검은 유타카가 대원들의 신센구미 제복사이에서 무리없이 어울렸다. 새하얀 안색위에 그림자가 쏟아지는 것이 방해라도 된다는 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치면서, 한손에는 술을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이 꽉 담은 챙이 넓은 술잔을 크게 휘두르면서 남자는 기분 좋은듯한 얼굴로 술을 목으로 넘겼다. 마치 가슴으로 마시듯이, 불을 삼키는 목구멍이 크게 움직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곤도씨의 옆모습은 마치 꿈꾸는 듯했다. 과거에라도 빨려들어간 것처럼. 그렇습니까, 곤도씨? 이미 내가 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상상, 아니 회상, 하고 있어요? ...그렇겠지. 쉽게 그곳까지 닿은 곤도씨는 옆의 내존재를 잊어버린 듯 했지만 화가 난다거나 기분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지 운을 띄운 말의 끝이 조금 궁금해져서, 나도 모르게 술이 미끄러지는 술잔을 성급하게 들어 자작했다. 곤도씨가 그제야 히지카타씨의 웃음에 눈을 떼고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조금 웃어주었다. 그 물방울 떨어지는 술잔위로 술을 따라주면서. 

 

 

「토시는- 물 흐르듯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남자였거든」 

「.....」 

 

 

 그는 성급하게 술을 받지 않았다. 느긋한 목소리로 천천히 술잔을 내쪽을 향해 드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술병이 입가에 머금고 있던 물방울이 내 첫 번째 손가락위로 떨어질 때까지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겨우 술병과 술잔의 키스를 시도할 수 있었다. 또르륵, 물줄기는 마치 굴러가듯이 술잔위로 떨어졌다. 곤도씨는 쉽게 잔속에 달빛을 담는다. 

 

 

 꿀꺽. 술을 마시는 곤도씨의 얼굴엔 왠지 고통이 없다. 그 사람의 인생은 나못지않게 엉망 투성이로, 두 손에는 흙, 두 무릎에는 자갈, 이마에는 피, 뇌 속에는 괴로움이 엉켜들었을 법도 한데, 왠지 그는 낙천적이랄까. 심한 말로는 바보스럽달까. 그런 점에 있어서 곤도씨와  히지카타씨는 조금 닮았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곤도씨는 시원하게 잊어버리고, 히지카타씨는 과거를 안으며 그저 받아들이고, ..아마 내가 제일 비틀어져 있는 것 일거다. 나는 꽤나 짓밟으면서 버둥거린다. 헤어 나오고 싶어 하는 건지, 그냥 마냥 혼자 괴로워하면서 남을 괴롭히고 싶은 건지. 

 

 

 술에 취한 얼굴로, 곤도씨는 과거의 히지카타씨를 언젠가 읽은 애서처럼 중얼거렸다. 그 열뜬 목소리는 아마 곤도씨의 뇌회로가 잠을 요구해서 생긴 열이겠지만, 굳이 자라고 권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내가 잘 모르는 히지카타씨의 파편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다는 가벼운 설레임 때문 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밤, 춥지도 않은가 별로 두껍지도 않은 판을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 쉽게 건배하는 남자의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아까운 술, 어지러울 정도로 처소주위의 공기를 진득하게 바꿔놓은 술 냄새- 그 모든 것을, 내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귀는 끊임없이 속삭이는 곤도씨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곤도씨 말로는, 히지카타씨는 훌쩍. 사라지고는 했다고 한다. 

 

 하루, 이틀.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길어지면 십 일정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작은 거의 반강제로, 억지로 신센구미에 끌고 오고, 억지로 신센구미의 유카타를 입혔을 때, 남자는 반항하지 않고 담담했다. 묵직한 검은 쉽게 한손에 들거나, 받아들이며 옆구리에 찼다. 그러나 자꾸 사라지고,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곤도씨는 속을 많이 태웠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고, 남자는 또 떠났지만 또 다시 돌아왔다. 떠났을 때의 행세 그대로. 곤도씨는 언젠가,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는 지나가는 말투처럼 물었다. 어디갔다 왔냐, 토시? -뭐, 세상구경. 

 

 

 뭐, 세상구경.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듯 내뱉은 말은 내생각보다 더 깊게 곤도씨의 마음에 박혀있었던 듯하다. 남자는 혀밖으로 뱉는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했던 말같은데에도, 곤도씨의 심장에는 그게 또 그게 아니었다고. 피식, 하고 웃으며 곤도씨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었어」 

「.....」 

「언제부터 인 것 같아?」 

「.....」 

 

 

 그렇게 또, 엷게 웃는 곤도씨의 얼굴은 조금 복잡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재주가 거짓말로라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내가 말하기엔 좀 민망하긴 했지만. 갈등과 회한. 후회와 죄책감이라던가,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뿌듯해보이는 표정이었다. 

 

 

「긴 머리가 쏟아졌지.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리는 그녀석은 아마 정말,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나봐. -신센구미가 막부의 개가 되어버리고... 푸른색 유카타를 벗어야하고, 검은색 제복을 입어야했을 때- 더 이상, 훌쩍 떠나지않고. 내 옆에 남아있는 토시를. 난 아마, 보내줘야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보내주지 않았어」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긴 머리칼이 나부낀다. 깃발처럼 나부끼다가 밧줄의 끝이 풀린 것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그날의 기분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언저리가 이상하게 텁텁하다. 아마 나는,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던 것 같다. 왜 내가?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지만. 하여튼. 잔에 가득 담겨있는 영롱하고, 약간 싸구려 냄새가 나고, 그렇기에 더욱 쉽게 취할 수 있는, 흔들리는 수면위에 일그러진 내 얼굴을 담고 있는 술을, 바라보다가, 아무 미련도 없이 입술 속 혀를 지나 식도와 이어지는 목구멍으로 그냥 털어넣었다. 쓰다. 오늘 이 술은 더더욱. 

 

 

 

 

 

 

 

 

 

 

 

 

 

 

 

 

 

 

 

 

 

 

 

 긴 머리칼이 나부낀다. 남자가 가져오라한 단검을 야마자키는 쉽게 내보였다. 그 끝이 날카롭다. 새파랗게 날이 선 단검은 얼마 전에 벼린 단단한 검이다.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풀어 보여주지 않았던 히지카타는 그 날, 마당 앞에서 끈을 풀었다. 어깨 위로 쏟아지는 머리칼은 이상하게 구부러져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곧게 바람사이를 떠돌았다. 그리고 한손에는 단검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자신의 곧은 머리칼을 둥글게 말아 쥔 채로, 남자는 쉽게 목 부분 부터의 길이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끊어냈다. 

 

 

 침묵하는 곤도씨의 옆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눈 주위에 열이 달아올랐다. 왜 담담하게 앞 머리칼을 흩트리는 히지카타씨의 뒤에서, 조용히 서있던 내가 더 울고 싶어졌던 걸까. 꼴불견이야, 생각하면서 눈가에 필사적으로 힘을 준 것 같다. 손가락들이 더 떨릴정도로. 히지카타씨는 더욱 잘라냈다. 머리카락은 그냥 마당위로 흩어졌다. 야마자키가 마당위에 서서, 흩어진 머리카락을 수습하게 위해 허리를 굽혔을 때, 바람은 불어오고 가벼운 머리카락은 모든 곳으로 흩어졌다. 야마자키가 당황하여 잘린 머리칼을 시선으로 쫓았지만 산산조각 난 머리카락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었고, 그저 멍하니 마지막 머리칼이 완전히 멀어진 후에 야마자키는 곧 시선을 수습했다. 

 

 

 바람이 닿았지만 뻗친 머리칼은 넓게 퍼져주지 않았고, 일정한 범위에서 순서 없이 흩날렸다. 짧아진 머리칼의 밑동이 더더욱 새카만 파도가 치는 듯 했다. 히지카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문지르며 단검을 내려놓았다. 곤도씨가 스카프를 주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히지카타씨는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익숙하게 물고있는 담배끝의 재가 아주 조금 떨어질 정도로, 옅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스카프를 두르고, 그대로 제복의 겉옷을 휘둘러 입으며, 히지카타씨의 어깨는 조금 떨렸던가? 아니. 그 얼굴의 담담함 그대로 그저 침착했겠지. 

 

 

 ..토시. 

 뭐요? 

 ..... 

 .....? 곤도씨?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답지 않게, 싱겁긴. 

 

 

「...」 

 

 

 하하, 어색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히지카타씨의 담배연기는 처마 밑을 채우고, 높은 하늘, 구름 몇 조각. 조용하게 흘러갔던가? 아마 그날에. 

 

 

 

 

 

 

 

 

 

 

 

 

 

 

 

 

「끝내- 묻질 못했어」 

「......」 

 

 

 울먹이는 것 같아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았다. 곤도씨는 무한정으로 착하니까.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는다. 거의 비워진 몇 개의 술병옆에다가. 곤도씨의 손에 들려있는, 반쯤 마시고 반쯤 흔들리는 잔을 빼앗았다. 곤도씨는 반항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뱉듯이 곤도씨 잔의 술을 마지막까지 마셨다. 목구멍을 채 찾지못하고 턱으로 미끄러지는 물방울을 입술로 닦으며, 나는 곤도씨의 뺨을 조금 문질렀다. 

 

 

「-취했어요」 

「-소우고. 정말 창피해. 떠나고 싶어 하는 남자의 등을 떠밀어 줬어야했는데」 

「곤도씨. 주정이에요?」 

「나는 왜, 신센구미의 틀에 그 녀석을 잡아버린 걸까. 좀 더, 세상을 편하게,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더 어울리는 남자에게-」 

「....」 

 

 

 곤도씨의 어깨에 힘이 빠진다. 사람 좋은 미소 속에 약간의 씁쓸함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충혈된 얼굴은 더 이상의 술기운을 견디지 못할 듯 했다. 쳇, 짧게 혀를 내두르며 소매를 접어올린다. 그리고 곤도씨의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려 겨드랑이에 내 어깨를 끼워넣었다. 그대로 남자를 부축하여 일어나긴 했는데, 곤도씨가 조금 더 길어 다리가 끌린다. 후, 또 한숨. 나는 좀더 곤도씨를 일으켰다. 마당에서 마루위의 두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본 몇몇의 신센구미가 나를 도우러 달려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곤도씨의 약간 힘이 빠진 다리가 섣불리 움직이다가 빈병을 찼다. 빈병은 마루위를 데구르르 구르더니 마당위까지 떨어졌다. 

 

 

 히지카타씨는 자기가 앉아있는 장소까지 데구르르, 굴러온 빈병을 손으로 들었다. 술 몇방울이 떨어진다. 

 

 

「오키타. 무슨 일이냐」 

「-히지카타 씨, 곤도씨가 취했어요. 안에 들어가 눕힐게요. ..그리고, 술도 떨어져가고하니 슬슬 파하는게 낫지않아요?」 

「그래. 그게 좋겠군」 

 

 

 등 뒤로 히지카타씨의 목소리가 흘러내린다. 옷깃을 파고들어온다. 곤도씨의 입술이 조금 우물거린다. 반쯤 깜박이는 눈이 슬슬 잠에 잠식당하고 있는 듯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히지카타씨는 마지막 달빛을 마시듯 잔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툭툭 털었다. 대원들은 딱히 히지카타씨가 명령하지 않아도 그가 엉덩이를 든 것을 신호로 술자리의 뒤처리를 시작 하는 듯 했다. 그 사이에서 히지카타씨는 빈병을 하나 들고, 귓가에 대고 흔들어보다가, 실망하며 그 병을 내리고, 그 옆의 병을 들고, 다시 조금 흔들어본다. 

 

 

「곤도씨」 

 

 

 곤도씨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히지카타씨를 외면하여 등을 내보인 후 처소의 긴 복도를 걸었다. 

 

 

「어딘가로 훌쩍, 말도 없이 가버리기도 했지만 그는 꼭 다시 돌아왔어요」 

「.....」 

「그러니까. 떠나버리고 싶어 했던 게 아니라구요」 

「...아아」 

 

 

 술에 취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인정하는 목소리로 들려온다. 정말 들은 거고, 정말 이해한 거예요 곤도씨? 조금 아래에서 나는 숨소리가 일정해졌다. 나는 혀를 입안에서 도르륵, 굴렸다. 아마, 이런 소리 듣고 싶었던 거, 아니겠지. 아니, 어쩌면 정말 위로를 바랬던 것인가? 알 수 없지만. 아마 위로를 바랬던 거였으면 틀렸어요, 곤도씨. 

 

 

 내가 당신을 위로한다는 것은 우리 둘, 자위한다는 건데요. 

 

 

 똑같은 마음이니까. 

 

 

「......」 

 

 

 시간이 흐를수록 곤도씨가 무거워졌다. 그래도 천천히, 나는 곤도씨를 위로하고 말았어. 내 마음 또한 같이, 구제해주기 위해. 

 

 

 

 

 

 

 

 

 

 

 

 

 

 

 

 

 

 

 

 

 

 

「-.....」 

「아, 왔냐」 

 

 

 다리 아래로 쏟아진 유카타 너머로, 남자의 발가락이 조금 꼼지락 거렸다. 다리로 다리를 긁는 짓은 그만해, 없어 보이니까. 아마 남자는 이런 마음도 이해 못해주겠지. 그냥 피식 웃고, 문을 닫았다. 달빛이 엷은 창호지너머로 방안까지 침범한다. 

 저 검은색 유카타로 가려진 등을 넘어 보면 아마 남자는 혼자 홀짝이려고 챙겨둔 술병이 몇 병 구르고 있을 것이다. 턱을 괸 한 팔의 소매가 타다미 위에 쏟아져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손, 일부러 소매를 걷어 어깨의 라인위에 펼쳐둔 것은 술잔을 든 손가락이 소매로 방해받을 일은 사전에 차단한다는 거겠지. 나는 저벅,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또 꿀꺽, 잔속의 술을 마셨다. 

 

 

「.....」 

 

 

 남자의 머리위에서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술병을 하나 들었다. 비워버린 잔 위에 물방울이 굴러 잔 아래에 조금 고인다. 히지카타씨의 손가락위로 쏟아진 검은색 머리카락의 그림자를 구경하면서, 잔을 채워 넣었다. 빈틈없이. 투명한 것은 넘칠것같이 출렁이다가도 금방 제자리를 찾는다. 히지카타씨는 눈알만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곤도씨와, 대화가 긴 것 같더군」 

「..별 얘기 안했어요. 아저씨 수다, 슬슬 못 견디겠어요」 

「네가 제일 어리니까, 걱정을 제일 하는 거야」 

「하, 그건 몰랐네요. 고마워 해줘야하나 귀찮으니까 그냥 말아야하나. 그치만 나말고도 신센구미에는 걱정할 사람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히지카타씨라던가, 또 히지카타씨라던가, 또 오쿠지군이라던가 히지카타라던가」 

「시끄러 자식아」 

「....」 

 

 

 남자가 조금 투덜거린다. 피식. 가볍게 웃어본다. 남자의 머리카락위로 떨어지는 달빛 때문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더 선명하다. 조용히 남자의 뒤통수로 쏟아진 머리채에 손가락을 파고 넣어보았다. 남자는 조금 움찔했지만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고, 그냥 나를 바라보다가 눈알을 데굴 굴렸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과 손가락사이에 갇힌 머리칼은 갈 곳을 잃고 머물렀다. 술병은, 한 병 더 데구르르. 히지카타씨의 손안에서 작살나 또 속을 비웠다. 

 

 

「..그러고보니, 당신.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난적이 많았다면서요?」 

「...곤도씨가 그래?」 

「네」 

「...뭐, 젊었으니까. 그땐」 

「뒤에 남은 곤도씨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근두근하면서 눈물을 쏟아다고 하던데요?」 

「뭐? 무슨 소리야」 

「.....」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야. 그땐 그냥- 종종 목이 말랐을 뿐이지」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미련 없이 잘라내는 남자의 등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었다. 

 아마 당신은 그렇게, 쉽게 다 잘라내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 떠나는 것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잡을 것도 없고, 이곳에 눌러둘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행히도 비어버린 두 손을 스스로 안고, 당신은 떠나버릴 수 있는 거야. 

 

 

 당신에겐 그런, 놀라운 힘이. ..나에게는 없는. 별로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 ...힘이. 

 

 

「? 오키타?」 

「.....」 

 

 

 술잔이 데굴, 구른다. 

 그 손가락사이로 내 손가락을 비집고 넣었다. 술잔은 타다미위로 술을 토해냈다. 히지카타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가 잡지 않은 손끝으로 술의 궤도를 바꾸었다. 난 그의 턱을 잡았다. 그의 턱은 쉽게 나를 따라와주었다. 나도 모르게 혀를 먼저, 성급하게 입술위로 갔다댔다. 그의 곧게 뻗은 눈썹이 보인다. 흩어지는 앞머리도. 겹쳐져서 색은 비슷해지고, 누구의 머리칼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깊게 누르자, 입술은 좀 더 벌려지고 혀는 좀 더 감겨온다. 남자의 숨소리가 심장까지 닿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종종 목이 말라옵니까? 

 지금도 가끔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요? 

 미련 없이 잘라낼 수 있습니까? 

 

 

 그 머리채가 흩어지는 것을 끝까지 보지도 않은 당신 대신에, 추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아마 당신은 나의 머리를 꾸욱 눌러주는 것으로 인정하며 위로해주겠지만, 그렇다면 당신의 등조차 쫓지 못하는 내가 뒤에 남아, 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헉」  

「.....」 

 

 

 헐떡이는 숨을 내 숨 속에 가둔다. 채 넘어가지 않았던 술기운이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목까지, 주륵, 떨어지는 남자의 액체를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훑어 올리며, 그의 목을 조르듯 감쌌다. 남자의 손가락이 내 등 뒤의 옷깃을 꽈악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팔부분이 당겨질 정도로. 남자의 찌푸려진 눈썹, 쉽게 감아주는 두 눈동자, 그리고 전혀 미동 없는 목 아래의 부분과- 남자의, 숨, 하여튼 숨, 그리고 숨, 그것들을 전부 삼켰다. 끊임없이 당신과 나의 숨만 서로에게 반복하며 들숨 날숨했다. 

 

 

「아.. 이자식」 

「.....」 

「숨막혀... ..바보」 

 

 

 그 혀를 할짝이는 것을 끝으로 내 혀는 아쉬운 듯 떨어졌다. 마치 타공기가 침범하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나빠진다. 그 턱을 할짝이고, 그 뺨을 또 한 번 할짝이고, 그대로 목젖을 삼키듯 빨아내고, 나는 조금 더 남자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파묻었다. 

 

 

「...히지카타씨」 

「뭐야」 

「.....」 

「? 뭐냐니까」 

「.....」 

 

 

 웃어라, 오키타. 

눈치 채지 못하게 해. 남자가 내 눈물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 그는 눈치가 빨라, 배려도 깊어. 아마 조금이라도 인상을 찌푸리면, 눈가를 흔들어버리면, 남자는 눈치채고 내 목을 안아주는 위로를 할거다. 그럼 발정난 나는 그를 안게 되겠지만 그건 내가 그에게 안기는 것에 불과해. 지금 그에게 내가 위로를 받아버리면 뒤에 남은 나는 그를 쫓아가지도 못하고 영원히 끝장이야. 

 

 

 내 입가가 웃는 것을 알았을 때야 난 겨우 그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땀에 젖은, 술냄새가 가득한, 담배연기가 남은듯한 입술을 다시 한 번 손으로 쓸어내리며, 나는 생긋 웃었다. 

 

 

「있잖아요 히지카타씨. 머리카락 좀 더 꽉, 잡아도 돼요?」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냥. 잡고 싶어서」 

「....아프게 당기지 마」 

「...대체 안 아플수가 있겠어요? 꽉 잡는데. 바보 아냐?」 

「뭐! 이봐, 그- 아!」 

 

 

 움켜쥐고 잡아당기니 고개가 따라온다. 뒤로 꺾이며 턱이 코보다 좀 더 높게 솟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키스하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럽죠? 손에 무언가가 담겨있다는 것은. 아마 당신은 이 거추장스러운 짐 같은 것 때문에 영원히 이곳에서 떠날수가 없을 걸요. 영원히 자유스럽게는 못살아요. 세상의 어디든 떠돌아다니며, 세상의 어느 곳이든 물 흐르듯 흘러간다는 거, 그래요, 좋겠죠. 그러나 그렇게는 못하게 해요. 당신을 놓지는 않아요. 당신이 나없는 곳에서 행복하다는 거, 못참아요. 당신이 나없어도 살 수 있다는 거, 인정하지 않고요. 그러니까 날, 화나게 하지 마. 아니, 나의 불안도 눈치채지 마. 언제나 그렇게 신센구미가 당신의 족쇄처럼 당신의 발아래를 꽉, 잡고 있었으면 좋겠어. 

 

 

 만약 그걸로 당신이 괴로워져도 못 본 척 할거야. 만약 당신이 과거의 자유를 그리워한다고 해도 난 끝까지 못 본 척할 거야, 절대 손 안내밀어, 그런 일엔. 절대 당신의 족쇄, 안 풀어줘. 영원히 영원히 부리며 이곳에, 아니, 내 옆에 있게 한다. 당신이 죽어가도 썩어가도 새카맣게 타들어가도 절대 안 놔줘. 그러니까 당신은 영원히 이곳에 있어야해. 세상, 그 어느 곳, 당신이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도, 당신이 못 본 곳을 골라 가보고 싶어 한다고 해도, 절대 못가. 절대 못가. 절대로, 못가. 

 

 

 그러니까 기억하지 말아요. 

 과거의 모든 일. 

 되씹지도 말고 곱씹지도 말아요. 

 

 

 

 

 

 

 

 

 

 

 ...그냥, ...여기에. 

 

 

 

 

 

 

 

 

 

 

 

 

 

 

 

 

 

 

 눈앞에서 히지카타씨는 자고 있었다. 그 딱딱한 팔위에 내 머리가 얹어져있다. 눈가가 새빨갛게 부어있는 히지카타씨를 보니, 아마 또 내가 마지막에 지독하게 매달렸는가 보다. 그치만 나도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아프니까, 쌤쌤이야. 

 

 

「......」 

 

 

 ..그래도, 히지카타 씨. 지금 내 눈물, 못본 채 계속 자고만 있어준다면, 내가 빚진 셈 쳐줄게요. 

 

 

 

 내일 아침, 곤도씨한테 웃으며 차가운 냉수 한 잔, 갖다드려야겠다. 

 그리고 웃으며, 얘기해야지. ...이봐요, 곤도씨.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만 그런 거 아니에요. 사실은 나도- 나도. 

 나도, 이 사람에게. 묻지 못하겠거든요. 

 

 

...무서워서요. 

 

 

 

 

 

 

 

 

 

 

- done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