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의 31일 밤 여덟시가 지나가고

 

2019년 12월의 31일 밤 여덟시가 지나가고

 

 "그거야, 섹스하고 싶으니까."

 "......"

 

 뭘 그리 당연한 걸 묻고있느냐는 말투였다. 왜 지금 만나고 싶은데란 질문을 내뱉었던 히지카타는 잠시 벙찔 수밖에 없었다. 전화기라는 매개체를 사용할때면 늘 드는 생각이지만, 전선 저 너머의 사카타 긴토키는 실물을 앞에 둘 때보다 훨씬 낯설고 어색했다. 목소리가 히지카타가 알고있는 그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인물임에 분명한 존재의 목소리가 이런 매개체 하나로 이렇게나 달라지는구나 싶을 때마다, 히지카타는 수화기 저 너머의 사카타 긴토키가 보고싶었다. 그도 이쪽에 있는 히지카타 토시로의 목소리를 히지카타만큼 어색하게 여기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그 목소리는 낯설지언정 그 말투는 너무나도 사카타 긴토키였다. 히지카타는 저도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을 흘려버렸다. 긴토키의 의외라는 듯 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에. 웃었어 지금? 분명 무지 화낼거라 생각했는데."

 

 평소의 너라면 틀림없이 화낼 대목인데 웬일이야, 어째서야. 어쩌면 연말이란 것의 감성은 무려 히지카타 토시로도 그렇게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걸까. 히지카타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눈썹을 구부렸다.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정답이었다. 연말이고 2019년 12월의 31일이고 무려 밤 여덟시가 지나가고 이 타이밍에 히지카타 토시로라고 좀 덜 화내고 더 나긋해질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이라고. 히지카타는 또 한 번 웃었다. "화낼 게 뭐있냐." 긴토키는 귀를 간지럽히는 히지카타의 낮은 숨소리에 저도모르게 제숨을 죽이고 귀를 좀 더 수화기에 바짝 갖다댔다. 바스락거리는 사소하고 작은 소리까지 다 들려오는, 23세기 문명 최고! 긴토키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지금 히지카타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이었다. 어딘가로 걸어가 무언가를 열고 있는 참이었다. 긴토키는 그가 외투를 꺼내 입고있다고 확신했다. 심장이 쿵쿵 어항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하는 붕어처럼 튀어올랐다.

 

 "연인이 새해맞이 섹스가 하고싶다는데 기꺼이 응해줘야지."

 "아... 저기요... 저 긴토키씨 지금 큰일났음..."

 "섰냐?"

 "섰달까... 선 게 문제가 아니랄까... 그냥 당장이라도 폭발할 거 같달까..."

 "잘 참아 봐. 탄환을 장전을 해놔야지 불발탄으로 낭비할 일 있냐."

 

 긴토키는 더는 못참고 빽 소리를 내질렀다. "그냥 우리 중간에서 만나면 안 될까요?! 너 올때까지 나보고 어떻게 기다리라고!!" 히지카타가 깜짝 놀라 목과 어깨사이에 끼우고 있던 핸드폰을 거의 던져버리고 말았다. "고막 찢어지는 줄 알았네." 히지카타는 방금까지 폰을 대고 있던 귓가를 문지르며 입고있던 외투를 마저 입었다. 그리고 이불쪽으로 내던져진, 여전히 전화너머 뭐라뭐라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긴토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야 이 히지카타 토시로야 어 너 탄창에 총알이 대체 몇발 들어가는지는 알고있는거지?! 어 이 히지카타 토시로야 너 진짜 각오하고 있는거지? 긴토키씨 한 발도 안놓친다 진짜!") 폰을 다시 집어들고 또 한 번 속삭였다. "너 지금 밖에 나가면 그거잖아, 공연음란죄."

 

 "그냥 집 보일러나 따끈따끈 틀어놔라. 없는 살림 아낀다고 설치지 말고."

 "내가! 바로! 내가! 사카타 긴토키씨가 너를 위해 준비 된 난로임!"

 "아니...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난방임 진지하게. 지금 진짜 춥거든 농담아니고."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헛소리에 (아냐 아마 꽤 진심이었을 거야.) 적당히 대꾸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외투주머니에 폰을 밀어넣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괜히 앞머리를 쓱쓱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다가, 바깥바람에 어차피 엉망이 될거란 생각이 들자 별 의미없는 짓을 다하는 구나 싶어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괜히 한 번 더 그 한심한짓을 반복했다. 앞머리를 쓱쓱. 사카타 긴토키의 머리는 푹신폭신하겠지. 오늘도. 히지카타는 허공을 매만지는 것으로 긴토키의 파마머리의 감촉을 대신한 후 목도리를 들어 목에 감으면서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냉기가 몰려왔지만 동장군의 도끼가 히지카타의 발걸음을 멈출만큼 매섭지는 않았다. 아니 적어도 히지카타에게는 꼭 그렇게 느껴졌다.

 

 근데 전화 받자마자 한걸음에 달려나가다니, 새해맞이 섹스를 바라는 건 오히려 내쪽인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신센구미 처소의 대문도 한참전에 지나고 겨울밤이 내리고 때때로 매서운 바람이 스치우는 가부키쵸의 도로를 발로 꾹꾹 누르며 한참을 걸은뒤에야 히지카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괜히 입숙을 삐죽였다.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이쪽이 더 손해인 것 같기도 한 것이. 그러다가 이윽고 히지카타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손해면 어떻고 좀 억울해지면 어떠냐. 오늘 전화로 이 말을 하기까지 사카타 긴토키가 그간 꾹꾹 눌러버린 것을 생각하자면 이정도는 손해도 아니리라. 히지카타는 또 한 번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반으로 가를 듯이 스쳐가자 본능적으로 눈을 꼬옥 감았다. 목도리를 좀 더 잡아당겨 코위로까지 올리고 브이자 앞머리가 양옆으로 헤쳐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한걸음을 내딛자, 감은 눈의 꼬리쪽에 눈물이 맺혔다. 히지카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어둠 가득한 밤의 길을 꾹꾹 걸었다. 입술사이로 냉기가득한 숨이 하얗게 하얗게 피어오르다 부서졌다. 연인이 되고나서 긴토키는, 해의 마지막날엔 꼭 전화를 해왔다. 올해 신세많이 졌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새해 복 많이 받아. 그 세마디를 위해서.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성실함이란 그런거란 걸 그러니까 연애 시작하고 2년이 지난뒤에야 깨달은 것이다. 전화를 하고 그것만으로 됐다는 듯이 전화를 먼저 끊는 사카타 긴토키는 그런 거란 걸.

 

 그런 그가 3년, 4년, 5년째에 겨우 말한 것이다. 해의 마지막 날을 같이 보내고싶다고.

 그 이유가 섹스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진짜 그냥 난로만 되어준다해도 좋았다.

 

 가부키쵸를 지키는, 연중무휴 무장경찰 신센구미에겐 연말이나 연초나 빨간날이나 검은날이나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늘 같은 근무체제의 쳇바퀴만을 돌렸다. 아니 연말 연초면 오히려 비상체제에 들어가야 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이 느는 시기였다. 하여간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높으신분들의 행사때문에 신센구미도 여기저기의 빈자리 땜빵하느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를 지경이 되니까 말이다. 작년 이맘때쯤 히지카타는 수도에 올라가 퍼레이드의 경호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 때의 그 찬바람, 그 뼛속 깊은 곳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냉기는 지금 이 바람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그땐 가부키쵸도 아니었고 긴토키, 그러니까 너도 너무 멀었는걸. 네가 전화를 해주긴 했지만. 난 어느날부턴가 네가 노력해 삼키는 그 말들을 대강 눈치챘더랬다. 니가 참아주는 짧은 행간들을 발견했지. 사실은 지금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사실 모든 특별한 날엔 늘 너와 함께 하고싶다. 그 말들을 새해 복 많이 받아로 변환하는 너의 상냥한 발성을 이미 알고 있다고. 난.

 

 망설임을 숨기려 침 한 번을 꿀꺽하는 사소한 소리까지 다 들려오는, 23세기 문명 최고.

 

 그러니까 난 너에게 보상해야 한다. 너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손해이고 억울함이라면 그것은 기꺼로운 나의 몫인거지. 히지카타는 차가워진 손발을 외투 속으로 더욱 깊숙이 넣고 목을 한층 움츠렸다. 목도리 안쪽은 아직 따뜻했지만 목도리밖은 털실들이 굳은 것처럼 차게 바삭거렸다. 히지카타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깊이 내쉬며 길을 걸었다. 발가락 끝에 감각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사카타 긴토키는 밖에 나와 있었다. 저 바보. 얼마나 추운데. 겨우 한텐하나로.

 

 털모자를 눌러쓰고 두껍고 큰 솜한텐을 걸치고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로, 아파트의 복도에 나와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카타 긴토키는 꼭 어제도 만난 것처럼-둘은 이주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익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히지카타에게만 보여주는, 히지카타가 보고싶다는 표정이었고, 그래서 그 표정에 익숙한 것은 사실은 히지카타 뿐이었다. 입술사이로 빠져나오는 육안으로 보이는 입김이, 부서지는 밤하늘은 은색으로 빛나고, 별빛이 녹아내렸다. 히지카타는 숨을 내쉬었다. 바보야. 난로가 나와있으면 어떡해. 난로가 식잖아. 식은 난로는 아무 소용없잖아.

 

 "장전 된 탄환은 또 어쩌고."

 

 목도리 안에서 중얼거리니, 히지카타의 목소리가 히지카타의 목언저리에서만 맴돌았다. 그때 긴토키가 고개를 움직여 히지카타를 발견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꼭 그랬다. 히지카타는 목도리안에서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긴토키가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아니아니아니. 어차피 다시 올라가야하는데 내려올 거 없잖아. 거기다 끌어안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달려오는 거 나 좀 겁나는데다가... 진짜 너네 집 현관앞에서 날 끌어안거나 할 건 아니지?! 히지카타는 거의 자신을 향해 날아올 듯한 기세로 달려온 긴토키를 보며 오히려 주춤하고야 말았다.

다행히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보자마자 소리는 질렀지만.

 

 "춥게!!!"

 "......"

 

 나름 중무장 하고 나온 히지카타는 머쓱해지고야 말았다.

 

 히지카타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고민의 끝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긴토키는 허둥지둥 한텐을 벗어 히지카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긴토키의 체온덕분에 더욱 따끈따끈한 한텐은 찬바람에 천이 얼어붙은 히지카타의 어깨부터 녹여주었다. 히지카타는 한숨을 쉬었다. 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는 것, 이것이 현관앞에서의 포옹과 뭐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뭐, 어쩌랴. 어쩌겠어 벗어주는데. 히지카타는 그냥 손을 뻗어 긴토키가 쓰고 있는 털모자의 안쪽으로 기어코 손가락을 밀어넣고, 그 안을 아무렇게나 헤집었을 뿐이었다. 아까 거울앞에서 허공을 매만지던 바로 그 손길과 똑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래. 이 감촉. 이 감촉이었음을.

 

 "코 빨갛다. 너." 히지카타가 피식대며 말하자, 긴토키도 마주 피식대었다. "야 그 말 그대로 너에게 돌려줄 수 있거든." 긴토키가 손을 뻗어왔다. 코를 움켜쥐려는 행동이란 걸 알았지만, 알았음에도 미처 피하지 못했다. 피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차갑다." 긴토키는 뭐가 그리도 행복한지 웃음끼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고, 히지카타는 아랫입술을 가만히 떨었다. 그럼 니가 녹여줘. 아, 이 말은. 이 말은 도저히 못하겠다. 아무리 연말이래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히지카타는 결국 그 말을 내뱉길 포기하고 그냥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찬 바람. 초롱한 별. 밤은 깊은.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등뒤를 따라갔다. 그에게로 향하는 길을 꾹꾹 눌러걸어온 것처럼, 계단을 꾹꾹 누르면서.

 

 

 

 

- done

 

고요한 밤. 모두 행복하세요. 좋은 내일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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