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당신은 내 곁에 피어 있었으면 좋겠어.
히지카타는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한동안 그 존재자체를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거기다 요새같은 시대에 이런 구시대의 물건, 정말정말로 골동품이 된 이것은 어느분야의 매니아같은 사람이 아닌한은 기억하기조차 어려웠음으로 더더욱 그랬다. 히지카타는 매니아가 아니고 매사에 물건에 관한한 집착도 거의 없었음으로, 말하자면 히지카타에게서 이 물건은 정말로 그 존재를 완벽하게 잊은, 것이었다. 심지어, 히지카타는 처음 이 물건을 발견했을 때 작동법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살면서 이 물건을 한 번이라도 쓴 적이 있었던가마저 가물가물했다. 그러다가 곧, 그것이 정말 자신의 물건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분명, 본 기억이 있긴 했었지만.
미츠바의.
" ...... "
그 이름과 마찬가지로, 너무 아련해서 바스러질 것 같았다.
히지카타는 먼지가 앉은 필름카메라의 필름통부분을 열었다. 전혀 기억이 안나더니, 하나가 떠오르자 줄줄이 꼬리를 물고 수면위로 떠오른다. 놀랍게도 필름이 들어 있었다. 찍혀있는 사진 몇 장. 먼지가 바람에 일어났다.
-
히지카타는 손바닥을 다쳤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칼날을 맨손으로 피하며 상대를 제압해야했기에, 말하자면 피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 한 손에 검 한자루도 없이 누군가와 대치하기는 거의 십여년만이라, 히지카타의 굳은 머리는 순간 바닥의 돌멩이 하나주워드는 재치도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에 오른손을 들어 날을 쥐듯 옆으로 쳐내어, 손가락이 전부 잘려나가는 대신에 손바닥의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응급처치로 제 스카프를 둘둘 만 히지카타의 꼬락서니를 옆에서 보던 오키타가 서슬 퍼렇게 웃으며, " 지문은 남았지만 손금은 날아갔네요. 당신이 죽으면 신원파악은 가능하겠지만 생명선의 근본이 없어졌으니 어떡하면 좋아요, 엉엉. " 했다. 히지카타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단지 거칠게 침을 뱉었다. 그것은 불투명한 것들이 뒤섞여 근본적으로 붉게 변한 침과 피의 혼합체처럼 보였다. 입에 고여있는게 불쾌할정도로 싫었다. 비릿했고. 그러나 그것과는 반대로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가, 히지카타는 어쨌든 오키타보다 물통을 들고 뛰어오는 야마자키쪽이 훨씬 반가웠다. 어쩌면, 물만 반가웠다. 그리고 시체가 타오르는 불꽃의 연기너머, 넘실대는 파란 밤의 기운들과 탁한 매연이 휘감아 들어와 몸이 뜨거웠다. 상처의 욱신거림이 몸을 더욱 달구었다. 오르는 미열에 편두통이 박차를 가했고, 히지카타가 걸어가는 걸음걸음마다 시커먼 피가 동그렇게, 동그렇게 흘렀다.
" 검. "
이번에는 군소리없이, 피에 푹 젖은 자기의 검은 건네면서, 오키타는 소리없이 히지카타의 오른손 부상이 자기가 보는 것보다 더 크고 고통스러운 흔적이기를 바랬다. 그것을 바라는 것이 마치 자기자신의 기본소양인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오키타가 염려해준 덕분에, 히지카타의 상처는 생각보다 큰 흔적이었고, 그래서 검을 움켜쥠과 동시에 상처에 밀려오는 압박은 가끔, 히지카타가 견딜 수 있는 통제의 영역을 벗어날 듯이 점멸했다. 그자리에 검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깜냥이었다, 신센구미의 부장으로 살아온 수많은 세월로 쌓아올린. 어쨌거나 지켜보는 많은 눈들 가운데에 서서, 언제나 늘 그렇듯이, 저 목을 치는 것은 검을 들고 우뚝 선 히지카타 토시로의 오른손에 들린 퍼런 검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와중에, 자신이 놓친 검이 대체 어디에 고꾸라져 썩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쓰러지고 부러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뻔하고 흔한 최후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휘두르는 오른손의 퍼런 검은 아무런 망설임도 가차도 없었다. 상상도 생각도, 관용도... 그 비슷한 모든 단어들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행위였다. 오른손은 그 어느때보다 그 어느 공간에서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상처는 또 한 번 점멸했다. 히지카타의 가슴에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열기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쓰러지고 싶었지만, 대신에 또 한자루의 검을 던졌다. 그리고, 뭐. ─그뿐이었다.
-
떨어져나간 살점을 따로 채우는 의학은, 히지카타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아무는 것을 기다리되 간단한 수술과 거창한 재활이 뒤를 따랐다. 다른 건 몰라도 동맥을 건드릴 정도의 상처부위와, 또 그것이 하필 사용하는 손에 났다는 것이 어느정도 문제가 되어, 히지카타는 결국 거창한 재활 내내 열을 동반한 편두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진통제와 동시사용이 안됨으로 두통약을 일체 얻을 수 없었기에, 히지카타의 안정제는 겨우 담배 몇가치 정도였다. 가끔 뜰에서, 만나면, (상처치료를 핑계로 신나게 놀고있는 히지카타 토시로 부장님을 향해 면전에 실컷 욕을 해대는) 오키타는 결코 히지카타를 말리지 않았다. 더태우세요 더태우세요 염불하면 했다. 대신에 야마자키나, 또 가끔 콘도가 오면 히지카타와 담배를 갈라서게 만들었지만, 야마자키는 최근 외근이 많아졌고 콘도는 일의 보고를 하러 장군에게 가 있는 상태인지라, 히지카타에겐 현재가 어느정도 행복하다면 할수도 있었다.
그래서 히지카타는 담배를 태워 물었다. 긴토키도 그런 히지카타를 말리지 않았고, 히지카타는 그점이 맘에 들었다. 온몸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아, 히지카타는 눈앞이 흐릿해진 채 가부키쵸를 걸어오는 것이 내심 무서웠다. 하지만 히지카타는 평소처럼 허리를 펴고 똑바로 걸어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다는 식으로, 그는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건 일상이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더 이상은. 지금 힘든 것이라곤, 긴토키가 오른손의 붕대를 세시간에 한 번씩 꼼꼼이 갈아주고 있는 정도랄까. 갈기전에 꼭 상처를 한번 소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실밥을 뽑지않았고, 상처자국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선명했다. 무통약때문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지럽고 가끔 미식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니 괜찮았다. 단지 세시간의 한 번씩 긴토키의 답지않은 섬세함이 손끝에 닿는 것이, 낯설고 거북했다.
그리고, 긴토키는 붕대에 테이프를 붙이는 것을 끝으로, 키스를 하는 것이다.
낯설고, 거북하게.
붕대끝으로 비죽 튀어나와있는 다섯개의 손가락에 하나씩, 키스하더니, 붕대위를 아프지 않게 만지작대며 손목에 키스를 하는 것이다.
손목에는 언제나 연하게,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 자국을 볼때마다, 히지카타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 상대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몸을 휩쓸고 나면, 누구에게라도 할 것없이 단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왠지 히지카타는 긴토키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송두리째로. 긴토키가 가득 안아주기를.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용서해주기를. 그리고, 그리고.
" 토시로. "
" ...... "
그 목소리로 불러주기를.
부드러운.
이 세상에 살아남은, 여전히 살아있는,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나를.
-
아마, 꿈을 꾸는듯한 미소를 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은 멍울진 채로 남아있었다. 바스락거리는 가슴속에서. 미츠바의 필름카메라이지만, 미츠바의 사진이 남아있는 것은 히지카타가 이 카메라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였다. 미츠바는, 한 번도,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한적이 없었다. 나란히 서있는 사진을 갖고싶다고 말한적도 없었다. 단지 미츠바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번, 말했었다. 그리고 프레임안에서, 미츠바는 환하게 웃었다. 햇살이 웃는 것같은 하얀 얼굴로,
히지카타는 사진을 찍었지만, 카메라에 담은 것이 다가 아니었다.
가슴에, 담긴, 미츠바는, 보석같았고 혹은, 햇살같았고,
그 무엇이든지간에 망설임없이 히지카타의 가슴을 찔렀다.
가슴에 박혔다.
그래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데 어느새 그 미소조차 희미해지고, 히지카타는 간신히 떠올린 미츠바의 웃음을 반추하며 조금 웃었다. 목소리는 벌써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렇게 모든 게 간단한 거였다. 완전히 쉬운 거였다. 하지만 히지카타는 왠지 슬프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아마 미츠바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혹은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라고 있거나. 아니, 이 모든게 단지 히지카타의 오만일수도 있었겠지만, 히지카타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미츠바는
죽은 것이다. 그리고
히지카타는 살아있으니까.
그래서, 히지카타는, 그렇다면 차라리 이 카메라의 필름을 현상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조금씩, 완전히 희미해지고 그 얼굴조차 도저히 기억나지 않을정도로 흐릿해지고 나면
그래도
그래도, 영원히 마음을 찔려,
박힌 가슴에 남아
너는 내 옆에 피어있겠지.
" 해결사. "
" 응? "
" 이거, 너해. "
" ....? 필름? "
" 버리던지, 태우던지. ...하지만 귀찮지 않다면, 가지고 있어줘. "
" ...현상해줄까? "
" ....아니. "
" ...그래. "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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