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끝까지 아름답게 살아남자. (백야차 ver)  

  

  

  

  

   

 

 

 

  

 조금, 조금만 더.

 눈꺼풀을 깜박이며, 백야차는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그 숨결이 떨리는 것마저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백야차는 참 앳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서 본 것은, 이 전쟁에 뛰어들고 나서도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나같은 사람에게 백야차란 그이름만큼이나 요괴같은 것으로, 눈에 보여도 믿지 못할만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나같은 사람의 아주 멀리, 언제나 선두중에서도 가장 첫머리에 서 있었습니다. 간혹가다 나같은 사람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수많이 제치고 그를 본다손 치더라도, 나는 언제나 백야차의 뒷모습이마나 어슴푸레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에서도 선명한 은색의 곱슬머리 한가운데로, 때묻지않은 새하얀 띠가 길게 늘어져 바람따라 춤추던 것이, 내가 언제나 보아왔던 그 백야차입니다. 새하얀 기모노의 소매자락으로 내려갈수록 피에 젖어 검붉게 변했던 것만이 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더러움 사이에서도 백야차는 홀로 새하얗게 빛났고 ─

 

 그래서 더욱, 꿈같았던 것입니다.

 

 그의 존재, 그 모든 것이.

  

  

  

  

  

 그리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중심'이 되어본 적이 없는,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늘 그런식으로 단지 사람의 머릿수만을 채우기 위해 태어난 나같은 사람은, (아 물론 나는 나의 그러한 위치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는 간도 배알도 작은 남자이지요.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살아왔습니다. 그런 내가 내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적이라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있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야 겨우, 나도 이런 나자신이 조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양이전쟁에 끝물에나마 참가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에 대해서요.) 백야차같은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선두에 있고, 나는 언제나 선두의 뒷꽁무니만을 쫓아 앞사람 발을 밟아가며 달려나가는 군중속의 단지 하나, 그저 하나일 뿐입니다. 단지 컴컴한 잿빛하늘에 새하얗게 나부끼는 그의 새하얀 머리의 띠만이 내 유일한 길잡이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두려움이 내 목구멍을 먹먹하게 채울때에도, 그 달 밝은 밤 하늘 아래에서

  

 달려나가는,

 그의 단단한 등은,

  

 나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언제나 내 발걸음을 재촉하는 힘이었습니다. 폭파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쇠검의 날카로운 냄새에 코가 막혀도 그래서 나는 적들을 향해 다시 달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새카맣게 몰려오는 두려운 적들은 전부, 아무래도 좋아지곤 했었습니다. 운좋게 내 칼이 상대의 가슴을 꿰뚫어도 좋았고, 꼭 그 반대가 되어버려도 좋았습니다. 그만큼 동그란 만월아래에서 은발을 휘날리며 춤추는 백야차는, 마치 마약처럼, 내 맘속의 두려움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알 수 없는 용기가, 배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곤 했었던 것입니다.

  

 

  

 그건, 나혼자만의 꿈입니다.

  

 아니, 어쩌면 나같은 사람들의 수많은 원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기꺼이, 그것들을 당신의 등에 전부 짊어지고, 또 언제나처럼 무수히 많은 밤들을 그렇게 홀로 춤추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개인의 고통, 당신 개인의 두려움, 당신 개인의 혼란... 그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은색 시위 드높은 춤사위만이, 당신의 서슬퍼런 검끝에서까지 흘러내려

  

 우리들의 모든 마음을 추스려주는, 아마 그런 것일겁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당신은 단지 꿈처럼 존재해도 좋았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당신을 볼 수 있을 거라곤 꿈에서라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당신은 아까부터 게속,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나를 독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예감은 삶의 그것보다 더 가차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힘을 빌어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것도 곧 완전히 끝나버릴 것입니다. 당신의 어깨가 무거워 보입니다. 수많은 원령이 백야차의 등에 자신의 꿈을 담아두었는데, 그 어깨를 또 나까지 빌려버리고 말다니, 당신은 이대로라면 곧 무너져버릴테지요. 백야차의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입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육체란 이렇게 무거워요. 솔직히 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아까부터 손끝에조차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내 두다리로 걷지않은 기분이 듭니다. 그렇지만, 전장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백야차, 당신이 내 무거운 육체를 잡아끌어,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거겠지요. 당신의 떨리는 속눈썹까지 보이는 거리에서, 당신이 아직 앳띈 얼굴을 하고 있음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고보니 나에게 있어, 당신의 연령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어린 친구에게, 우리들은 그 무거운 감정들을 사정없이 얹어버렸었군요. 이제와 좀 죄책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꺾일 듯 흔들리면서도, 당신의 무릎은 꺾이지 않습니다.

 나의 무거운 육체까지 짊어진 채, 떨어지는 젊은이의 핏방울 사이사이로,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 죽지 마, 너. 조금만 더 힘내. "

  

  

  

 당신의 울고있는 영혼이 들립니다.

  

  

  

 " 죽지 마. 너는 괜찮을 거다. 그러니까, 정신차려서, 너스스로를 다잡아. "

  

  

  

 아아.

 백야차.

 우리들의 은색영혼이여.   

  

  

  

 " 우리, 끝까지 아름답게 살아남자. " 

  

  

  

 나도 당신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나 스스로를 다잡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당신처럼.

  

 

  

 

  

  

  

  

  

  

  

 멀리서 우리들의 희망으로 빛났던, 당신도 아주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당신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아요.

  

  

  

  

  

  

 나는 죽었을까요?

 더 이상 당신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따뜻했던 눈물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에게 모든 것을 짊어지게 하고, 당신을 남겨두고 먼저 죽어버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백야차.

 나의 백야차여.

  

 나는 죽고싶지 않아요.

  

  

  

 단 한 번이라도, 당신과 함께 그날의 밤 그 만월아래에서,

 춤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바로 당신과 함께 ─────

  

 

  

  

  

  

  

  

 

 

 

 

 

 

 

-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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