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좋아해
(3-z ver)
나는 왜 너를 좋아하게 된 걸까.
-
오늘도 온다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보다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띵동, 하고 낡은 차임벨이 울린순간 전혀 기대 안하고 있는듯 무료한 잡지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가 사실은 무척이나 저 띵동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기는 일이다. 일상에 언제나 일어난 일이 오늘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어설픈 변명도 해볼수는 있겠으나,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일어나고 문가까이 걸어가는 걸음이 느려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또한 그냥 웃기는 일이었다.
문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안경을 다시 껴고, 슬쩍 거울을 스쳐보면서 셔츠의 깃도 정리하고... 그러다가 셔츠를 맨위의 단추까지 다시 잘 잠그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웃기고 기분나빠서 다시 단추를 대충 열어제끼고, 깃도 흐트려놓고, 머리카락 속으로 두 손을 넣어 마구 흔들고- 이러는 나를 문밖의 녀석은 알까. 아마 모를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파트의 얇은 정문을 열었다.
- ..왔냐?
-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인다. 검은 머리칼은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새카맣게 출렁인다. 가마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인사에 또 가슴이 뛴다. 제기랄. 평범한 무표정으로 그 검은 눈동자는 단지 나의 얼굴을 멀뚱히 보고 있을 뿐인데도 거기에 나는 괜히 가슴이 저릴정도라. 기분이 나빠질정도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그럴 필요도 생각도 없다-나는 단지 문옆의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두 팔을 괴었다. 그리고 문앞에 도착하여 띵동- 하고 낡은 차임벨을 누른 남자가 되어가는 소년을 찬찬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았다. 소년은 그런 내 시선이 조금 거북한 지 눈썹을 움직였지만 더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입술가까이에 댔다. 소년의 새카만 머리칼이 조금 흔들렸다. 몸을 휘감은 검은색 교복의 불완전한 보온을 도와주기 위해 걸친 더플코트는 단추가 하나도 채워져 있지 않다. 밤갈색의 더플코트가 잘 어울린다. 새빨갛게 질린 손끝에 쥐어진 검은색 가죽가방도.
소년은 가만히 다문 입을 아주 조금만 열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치 말을 복도의 아래로 던져 금방이라도 삼켜버렸으면 좋겠다는 듯이. 실로 처음부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 ...들어가도 돼?
- .....
너를 기다렸다. 나는.
매일 녀석은 나를 찾아온다. 오늘도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초조해졌고,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나의 아파트에 찾아오기를 사실은 언제나 기다린거다. 그러니까, 네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사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런 확인의 말같은 건 필요없어.
- ....
그러니까, 용서해라.
용서해라. 어른은 치사해. 게다가 간이 작지.
언제나 너를 확인하는 나를 용서해줘.
눈을 조금 내리깔은 소년의 뺨이 조금씩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 말을 언제나 하면서도 언제나 조금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 억지로 눈썹을 찌푸리며 형용할수 없는 생각을 하고있는 얼굴을 할때마다, 나는 이 문앞에서 소년을 가득 안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단지 입술위에 스치고 있던 손을 들어, 소년의 새빨갛게 질린 귓가의 끝에 댄다. 따뜻한 방에서 식어있던 내 손이 차가운 그의 귓가에 닿는 순간 그는 조금 어깨를 움츠린다. 단추가 잠겨지지 않은 소년의 더플코트는 끝에서부터 흔들린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 그녀석앞에서 그녀석을 향해 미소지을 수 있게된다.
- ...어서와, 히지카타군.
- ....
그리고, 꽃핀듯이 화사하게 조금, 미소짓는 본인을 모르는 듯. 너는 그렇게 아주 조금 입꼬리를 당겨 웃지. 가득히 쌓인 눈한가운데에 오롯이 숨겨져 핀 매화같은 미소다. 너는 아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 눈썹은 조금 찌푸린 채 그대로라고 생각하겠지만.
너의 그 미소를 보게 되면, 나도 가슴에 꽃다발 무더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아 다시 가슴이 뛴다. 일일이 이런 거에 가슴 뛰는 것도 지치는 일이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한다. 네가 들어온다, 따뜻한 나의 아파트 안으로. 나의 아파트 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금 좁고, 의외로 조금 깨끗하고, 그리고 사실은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내가 만들어놓은 2인분의 저녁식사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
- 조금 늦었네.
- ..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 번 더 데운 카레를 밥을 얹은 접시위에 닿으면서 슬쩍 물었다. 히지카타는 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 밤갈색 더플코트를 벗었다. 가쿠란의 깃이 갑갑한 지 손으로 셔츠안까지 쓸어내다가 히지카타는 접시 두 개를 들고 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잡지가 어지러진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잡지를 정리했다.
- 학원... 모르는 게 있어서 조금 물어보느라.
- 나도 선생인데. 나에게 물어보면 좋잖아.
- 당신 수학 모르잖아.
- ..일단 나도 이과선생이거든요..?
- 관둬. ..그리고..
- ? 그리고 뭐?
- .....
내가 건네준 접시를 받으면서 히지카타는 또 눈썹을 찌푸렸다. 새카만 머리칼은 끝에서부터 조금 푸석해져서 식어있다. 아마 찬 바람에 거칠어진 것일거다. 히지카타는 가볍고 조용히 한숨을 내뱉은 후 뺨을 조금 쓸었다. 갑자기 몸이 따뜻해져서 두뺨에 열기가 오르는 듯 싶다.
- 당신 집에까지 교과서 가져오는 일은 안 해.
- ...해도 돼.
- ..당신이 허락해도 안 해.
- 이런, 이런.
- 잘먹겠습니다.
- 네.
그리고 조용히 카레를 퍼올리는 숟가락의 움직임이 의외로 천천해서. 내가 다섯 번정도 퍼 먹을 동안 이녀석은 두 번정도 밖에 안먹는다. 그래서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 안에서 마요네즈를 꺼내 주었다.
-
- 그럼, 나 갈게.
- 응.
- ....
문앞에서 그를 배웅한다. 소년은 이 건물을 지나 공원을 조금 돌면 금방 나오는 아파트에 산다. 즉, 가까이에. 집에 가기전에 언제나 내 집에 들린다는 뜻이다. 학원을 마치고. 꼭 목에까지 잠근 새카만 교복을 몸에 둘러싸고, 교복의 부실한 보온효과를 높히는 밤갈색 더플코트를 입고. 나는 벽 천장의 서랍에 오른손을 댄 채 소년이 운동화를 신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년은 새카만 머리칼을 조금씩 흩날리며 곱게 뻗은 눈썹을 머리칼 속에 숨긴 채로, 고개를 숙여 신발의 끈을 묶고 있었다. 밤갈색의 더플코트는 소년의 몸을 감추고, 운동화는 소년의 발끝을 갑추고, 가방을 움켜쥔 손가락 끝은 벌써부터 조금 빨갛게 질려간다. 그는 머리칼을 오른손으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오른쪽의 맨발을 왼쪽의 발 뒤로 돌려 든 채로,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주 조금 웃었다.
- 추운데 조심해라.
- 응.
- 잘가고.
- 응.
- ......
- .....
- ..뭐 할 말 있니?
- ...선생.
- 음.
히지카타가 나를 부른다. 히지카타의 목소리가 조용히 속삭인다. 검은색 머리칼이 사락이며 귀뒤로 넘어가는 순간, 소년의 고개가 조금 들려 나를 바라본다. 닫힌 아파트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은 채고, 평소보다 조금 높은 방안이 약간 더워졌다. 나는 안경 너머로 아주 짙은 검은색의 블랙혹을 담은 듯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고, 오똑한 잘생긴 코를 조금 치켜든 채로 히지카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키스해줘.
- ....
- 선생.
- ......
나는 왜 너를 좋아하게 된 걸까.
석양이 지는 날. 새빨갛게 하늘은 흐려지고 캄캄한 한밤도 밀려오지 않았는데, 어째서 세상은 금방 빨간 기운에 몸을 적시고 마는걸까. 석양은 그대로 길어져 아파트도 구름도 놀이터도 자전거도 새빨갛게 삼켰다. 그 새빨개지는 구름 아래에서 나는 왜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을까. 그리고 그옆에 있는 너도. 너의 조금씩 황혼에 젖어가는 검은색 머리칼, 새카만 교복으로 감싼 몸과 그 위이 더플코트, 손가락이 조금 질릴정도로 꽈악 가방을 잡고있는 너의 무표정한 모습을
나는 어째서 좋아하게 된걸까.
- 선..
네가 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너의 오른팔을 나의 왼팔로 붙잡았다. 원래는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너보다 더 큰 키지만 지금은 방위에 있어서 너의 머리하나 정도는 더 컸다. 네가 눈을 감기도 전에 너의 까슬한 입술위에 내 입술을 포갰다. 입술은 말랑하고 조금 차고, 바람에 조금 텄다. 나의 눈앞으로 너의 검은 머리카락이 사라락 흩어지는 것을 이마결로 느꼈다. 내가 움켜잡은 너의 오른팔이 조금 흔들리는 가 싶더니 멈추었다. 긴 속눈썹이 움직였다. 이제야 눈을 감은 네가 안심한 듯 두 팔로 나의 옷을 잡았다.
눈을 뜨니 너도 눈을 떴다. 가까운 코끝으로 싫지 않은 입김이 간지럽게 퍼졌다. 떨어진 가방은 나의 신발위에 뒹굴고 있었다. 너의 더플코트는 아직 표면도 따뜻했다.
그리고 너는 조금 웃었다. 내 마음에 꽃다발 한가득 안아 담아주는 것과 같은 웃음이었다. 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꽃은 형태가 분명했고, 그 날의 석양처럼 조금 빨갛고, 오늘의 너처럼 조금 하얗고, 오늘의 나처럼 상당히 들떠있었다. 너의 조금 빨개진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대로 너의 뺨위로 내 손가락을 갔다댔다.
- 선생.
네가 나를 부른다.
응? 왜?
- 나는 왜 선생을 좋아하게 된걸까...
- ....
나는 왜 너를 좋아하게 된걸까.
대답하는 대신에, 너에게 물어보는 대신에, 나는 스치던 너의 뺨에 키스했다. 너는 간지러운 듯 조금 웃었다. 나는 너의 목줄기에 키스했다. 그리고 그대로 너의 단추를 끝까지 잠근 셔츠에 도달했다. 너는 조금 눈썹을 찌푸리며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내 입술위로 너의 차갑고 뜨거운 살결이 아니라 식은 체온을 담고 있는 셔츠의 감각이 느껴졌다.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조금씩 입술을 눌렀다. 너의 딱딱한 뼈위에 조금 붙어있는 살이 조금 눌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어깨를 쥐고 있는 너의 손가락이 살을 누를정도로 파고들었다.
- 선생..
- ......
고개를 들어 다시 키스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정도로 키스를 해줄까. 아니면 네가 좋아할정도의 애무를 해줄까. 나는 절대로 너를 정신도 못차리게 할만큼 기분좋아지는 일을 해줄 수 있다. 처음에는 네가 허락하지 않아도 결국 무너져 온몸을 나에게 맡길정도로 키스해줄 수 있어.
- 선생...
떨리는 너의 목소리가 나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마음은 다발로 만들어 너에게 안겨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네가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몇 번이고 몇번이나 너에게,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다발로 너의 방을 가득 채워버렸을텐데.
- 히지카타...
- ......
나는 왜 너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너는 왜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 답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아줘.
나는 너를 좋아해.
너에게서 입술을 뗀 내가 너의 하얀 얼굴을 향해 말했다. 입꼬리를 당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 조금 더 있어주지 않겠어?
- ...치사해..
긴장에 웃지도 못하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더욱 웃는다. 응, 어른은 치사해. 이럴 때 진짜 마음을 숨기고 너를 향해 웃음을 지을 수 있다거나,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에 네가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만큼 애무를 해준다거나, 그런 생각들만 하고 있지.
용서해줘. 어른은 치사하고, 간이 작고.
그리고. 또 그리고.
-
그리고 나는, 내일밤도 너를 기다리겠지. 기다리지 않은 척 뛰는 가슴을 숨기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잡지를 한 장씩 넘기며. 너는 내일도 올 거다. 그리고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조금 늦게 오겠지. 그래서 나는 네가 낡은 차임벨을 띵동- 하고 누르는 것을 듣는 순간 꽤나 두근, 해버릴거다.
그러니까, 히지카타.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줘.
그리고, 내일 또 네가 오는 것을
기다릴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러니까,
- ...부탁한다.
- .....응.
네가 꽃처럼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을 수 있었다.
-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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