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혼30제] #26 11. 02. 14
26. 괴롭다는 것은 자신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3-z 동급생 ver)
몸의 점의 수를 센다는 핑계는 정말 말그대로 핑계였다. 그것도 굉장히 같잖은 핑계였다. 하지만 그 같잖은 핑계거리를 내 눈앞에 던져둔 그녀석에게 나는 왠일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계속 내 마음이 조용히, 어떤 리액션을 취할 모션을 주지도 않았으며 나는 단지 그에게 먼저 왼팔을 내어주었을 뿐이었다. 이 왼팔을 내어주는 행동은 꼭 기계같은 삐걱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기가 시킨 일인 주제에 순순한 내가 마음에 들지않은지, 그의 왼쪽눈썹이 중간에 꺾이더니 불만이 녹아있는 것처럼 입을 앙 다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건가. 그래서 세겠다고 말겠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 눈동자가 내 눈빛이 너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고, 너는 불만은 있을망정 불만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어쨌거나 내 왼팔을 집어 소매를 걷어붙였다. 티셔츠의 소매끝부분의 목이 잔뜩 늘어나있는 면티였고, 기본은 하얀옷이었지만 잦은 빨래에 의해 부분부분이 누렇게 변색되어 밖에서는 더 이상 입지못할 옷모양새였다. 그걸 올릴 수 있는 부분까지 전부올렸으니 더욱이 늘어날때로 늘어나, 나는 옷 한 벌의 최후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련한 덕분에 근육이 붙은 팔뚝위로까지는 못올라오고 그 아래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옷의 주름은 물결의 두서없는 흐름처럼 보였다. 그는 내 왼팔을 손바닥을 위로 올린 형태에서 훑어보았다. 손가락 하나로 혈관을 따라 올라오는데 혈관을 쫓아오는 폼새가 꼭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쫓아 가는 자가용처럼 느껴졌다. 혈관을 좇는 그의 가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그냥 같이 나의 혈관을 좇았다. 혈관을 지나가다보면 꼭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난 오토바이 사고처럼 혈관이 부분부분 끊기는 듯한 상처를 지나가야만 했는데, 가끔 오토바이 사고 정도가 아니라 자동차 세대정도의 추돌사고인듯한 규모의 흔적도 나타났다. 그 흔적위에서 너의, 자가용으로 분한 손가락 하나는 잠시 멈칫거렸다. 꼭 혈관이 끊어진 것 같이 피부표면위에 마구 울퉁불퉁하게 일어난, 상처는 내가 태어났을때부터 내 피부위에 있었던 것 마냥 선명하고 정확했다. 후천적인 자국임에도 꼭 선천적인 태생인냥. 너의 아랫입술이 달싹였는데, 무언가 말을 하고싶었던 건지 아니면 아무말도 하지않으려 했던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울먹이려고 했던건지, 아니면 단지 숨을 들이쉬는 건지. 차라리 못보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너의 아랫입술의 움직임.
- 몇 개 있냐?
- 몇 개 없네.
- 그래서 몇 갠데?
- ......
말을 하지 말라는 듯이, 그는 내 아랫입술에 성큼 다가와 도톰한 이불을 살부분을 깨물었다. 아야, 밖으로 나오지 않고 속에서 울음이 나왔다. 그래서 너는 아야소리를 못들었을테지만, 치아로 꼬옥 깨문 아랫입술에 자국이 남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는지 너는 너가 남긴 치아자국을 보고 피식 웃더니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깨물었다.
- 다른 쪽 보자.
- ......
- 빨리. 몸 전체 다 볼려면 시간이 어지간히 들거니까 빨리 빨리.
- 그냥 다 벗을까?
- 니가 다 벗으면 내가 점조사가 되겠니?
- 왜 안 되는데?
- 그건 나한테 묻지말고 내 화동포한데 물어줄래.
- ...니 화동포랑 내가 대화가 된다면.
- 된다면?
- 물어뜯을텐데.
- 죽여라 차라리.
죽일수 있다면 옛적에 죽였을거다, 잠깐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마, 그래도 역시, 죽이지 못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 점을 센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 해줬으면 하는데 그는 그만하지 않았다. 그만하지 않고 정말 다른 쪽 팔도 전부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계속 진행을 해나갈 기세였다. 나는 그가 정말 그만했으면 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진심으로 그에게 그만해, 라고 말할 생각은 하지않고 순순히 오른쪽팔을 내민다. 낡아서 부분부분이 변색된 목이 늘어난 면티는 처음에는 흰색 티였다. 흰색에도 농도가 있다면 이 흰색티는 좀 진한 편에 속했다. 가슴부분에 속이 텅 빈 빨간줄이 네모를 만들어 꼬리를 잇고 있었다. 꼬리를 잇고있는 빨간색의 네모틀이 마음에 들었었다. 속이 비어있는 것도 그렇고, 옷의 아주 구석에 싸구려 브랜드의 로고가 작게 박혀있는 것도 그렇고. 오른쪽팔은 공사중인 곳이 부분부분 있었다. 상처위에 보호막처럼 자리잡은 딱지는 아쉽게도 상처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먼저 너덜너덜 해져 있었다. 주변의 살을 누르면 금방 피가 배어나올 것 같은 부분도 있어서, 나는 그의 가마를 바라보지 않고 그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그의 주변의 공기가, 다른 형태를 띤다면 그때부터 혹시 그가 울고있는건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걸까. 나는 눈을 깜박였다. 울고 있지 않지만, 앙 다문 아랫입술에 핏기가 사라진다. 그의 그런 모습을 점점 볼 수록, 나는 오히려 마음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혹시 그가 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을 내가 혹시 정말, 단 일말이라도 바랬던 적이 있는건가. 생각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평야위를 쓸고지나가는 단칼같은 바람과 비슷하게 마음이 날카로워지는것만을 느끼며, 나는 그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색머리칼에 파묻혀 긴 속눈썹 위에 은알갱이가 뿌려져있는 것같이 눈썹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 그래서 몇 갠데?
- ...더 없네.
- 내 몸에 점이 별로 없어?
- 어.
- 그럼 뭐가 많은데?
- 뽀뽀해도돼?
- ......
지금도 아무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두 눈썹을 밑으로 구부리며 너가 웃는다. 처진 눈꼬리 끝으로 은색 알갱이가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비교적 자유로운 손을 들어 너의 순서없이 이마위에 흩어져 있는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닿는 머리칼은 차가웠고 부드러워 거리낌이 없었다. 너는 눈을 감는가 싶더니 다시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시야앞에 내 앞머리칼 사이사이로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교적 가깝고 비교적 하얗고, 비교적 날카로운 너의 턱매를.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허락하지 않은 키스가 눈가에 쏟아졌다. 감은 눈은 허락의 의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배 언저리 깊은곳까지 떨어진 마음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그에게서 뒤돌아 앉아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차가워 등줄기가 조금 긴장한 것 외에는 변하는 게 없었다. 그는 다 늘어난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등 부분이 순식간에 시원하고 허전했다. 옷을 당길 수 있는 곳까지 당겨대서 배부분이 팽팽해지고 겨드랑이 죽지도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는 두다리를 최대한 배로 끌어모으고 두 팔로 다리를 꽈악 오므렸다. 두 다리의 무릎을 나란히 가슴으로 당기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다리가 길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남자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다리를 모으니 오른손이 왼손의 팔꿈치 지난 어느부분을 움켜잡고 있었다. 몸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등에 신경이 집중되어, 그가 떠듬떠듬 등을 더듬는 것에 온 촉각이 몰려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자리가 솜털이 솟은 마냥 간지러워서, 나는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등이 식어가는지 그의 손이 더욱 차가워가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날개죽지 아래에서부터 허허함이 늘어나더니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그가 빨리 끝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에는
죽기 싫어하던 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등이나 배나, 식칼로 죽죽 긁히면 죽기는 매 한가지인데 나는 죽어라고 등만을 보였다. 사람에게 중요한 내장기관은 배쪽에 다 모여있을테니까 배를 무조건 감싸쥐고 난 등을 보였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배가 식칼로 죽죽 긁히는 것보단 등이 죽죽 긁히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때 그 행동 그대로 등은 여전히 죽죽 긁힌 상태였고, 배는 비록 지워지지않은 멍이 몇 군데 들었을 망정 죽죽 긁힌 자국은 없었다. 나는 그가 손가락으로 죽죽 긁힌 상처를 죽죽 긁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숨소리가 등에 닿는 것에도 일일이 반응하는 신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더욱 움츠렸다. 죽죽 긁힌 상처들은 곪고 터진 뒤에 다 나았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피부는 일그러져 남아있었고 상처는 선명하고 진했다. 상처에도 농도가 있다면 말이다. 내 눈으로 보긴 힘든 곳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하여간 그러할 것이었다. 아까보다 더 그의 표정이 신경이 쓰였지만, 등을 보인 상태인지라 조금이라도 추측할 수 있을만한 꺼리가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버석버석대고, 머리카락은 차가웠다.
- 몇 개야?
- 나 점 안 세.
- 야 이 뻔뻔한.
- 이제 와서 미안한데, 그거 그냥 핑계.
- 이제 와서 말 안해도 다 알고 있었거든 이 파르페귀신아.
- 그거 욕 아니야 토시로야.
- 나한텐 욕이야.
- 아니야 천사 언어야.
- 너나 지옥 가.
- 같이 가.
- 너나 가.
싫어, 같이 가.
작게 중얼이며, 긴토키는 등에 뺨을 대었다. 나는 흡, 하고 순간 숨을 참았는데, 심장이 꼭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싫어, 같이 가.
- ......
꼭 그때처럼, 죽죽 긁어대는 식칼에 배를 감추던 그때처럼 두 다리로 상반신을 힘껏 감싸자, 배 아래 깊은 곳에 꼭꼭 숨었던 마음이 여전히 그 곳에 숨어 있는채로, 참 긴토키에게 해야할 말이라던가 하고싶은 말을 꼭꼭 숨긴다. 사실은 처음부터 계속, 이 말이고 저 말이고 전부 긴토키에게 떠넘겨 싶어했던 것이라는 걸 이제 깨달았다. 하지만 꾹꾹 참아야 한다고 외치는 나의 자존심도. 사실은 전부 다 너에게 맡기고 네 어깨에 기대고 네 품에 전부 쏟아버리고 싶은 나의 기대도. 짐이 되기싫다는 나의 허세도. 단지 너에게 위로받고 싶어하는 몸을 작게 구부린 나의 외로움도.
그리고, 같이 가주겠다는 너의 말은 이렇게 달콤하게 나를 얼싸안는다.
나의 괴로움이, 꼭 너의 괴로움인 것 같다.
- ...내가 있었어야 하는데...
- .......
너의, 생각을 거치지 않은 날 것 상태인 너의 말이
단지 가식처럼 느껴지지 않고, 정말로 정말인 것 처럼 들렸다.
그래서 너의 속삭임은 나의 마음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넌 나의 등 뒤에서 조용히 울고 있는데, 오히려 나는 조금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 done